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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나이 프로필 불후의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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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사익 나이 프로필 불후의명곡

 


안녕하세요. 오늘은 불후의명곡 544회 출연하는 소리꾼 장사익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장사익은 충남 광천의 시골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시절 상여 소리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영향 탓일까 그의 노래에는 유독 <죽음>에 관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가 소리꾼으로 이름을 드높이던 시절 모친이 세상을 떠났을 때 빈소에서 모친이 막 시집와서 자주 부른 노래 <비내리는 고모령>을 불렀고 경제학자이자 언론인 정운영 영결식에서 <봄날은 간다>를 열창했습니다.

 

작가 이청준 장례식장에서는 시에 곡을 붙인 <황혼길>을 헌창하는 등 애환이 절절한 소리꾼의 목소리 탓일까 유독 그러한 점이 눈에 띄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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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나이 프로필 고향 가족 학력 데뷔 결혼 자녀 직업


장사익 나이는 1949년 생으로 올해 72세 입니다. 고향은 충남 홍성군 광천의 시골마을 입니다. 장사익 데뷔 1994년 소리판 1집 <하늘 가는 길>이며 소속사는 행복을 뿌리는 판 입니다.

 

장상익 학력 광천중학교 졸업, 선린상업고등학교 졸업, 명지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졸업 했습니다.

 

1970년 곡을 발표한 사회 초년생 장사익


소리꾼 장사익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데뷔는 그의 나이 45살 무렵 1집 <하늘소리>로 알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직장을 다니면서 동시에 낙원동에서 노래를 배웠습니다.

 

당시 그는 장나신이라는 예명을 사용했는데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린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1970년 당시 여러 가수들의 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LP 앨범 B면에 <대답이 없네>를 녹음했다고 합니다.

 

45살 나이 늦깍이 데뷔한 소리꾼

 

장사익은 고향 광천 뒷산에서 5년간 소리 질러 목청을 튀우고 노래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채 취직을 하고서도 서울 종로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을 드나들며 꾸준히 음악공부를 했습니다.

 

작곡가 한동훈 선생에게 가요의 가르침과 당시 유행하던 샹송 등을 3년간 배우기도 했습니다. 군 입대 당시에도 문화선진대 오디션에 합격해 제대할 때까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이후 생계를 위해 직장생활에 전념하게 됩니다.

 

장사익 직업 15개를 바꾸다

 

사실 직장생활을 하게된 주 된 이유는 데뷔를 하려면 몇 천만원이 들고 PR도 해야하고 상납하는 돈도 필요해 결국 고려생명보험에 입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하자 회사고 동해생명이라는 회사로 인수 합병돼 그만두게 된겁니다.

 

장사익은 이후 갈데가 없어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갔더니 이듬해 1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1년만에 잘렸고 여우목도리에 꽂는 핀을 만드는 회사에 갔지만 잘렸습니다. 외판원, 연구소 경리과장, 청계천 전자상가, 독서실 등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동호회와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단소, 피리, 대금을 배우는 열정만큼은 남아있었습니다.

 

장사익은 결국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진짜 해보고 싶은 일을 하겠다'며 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태평소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합류해 태평소를 불었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뒤풀이에서 흥이 오르면 곧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본 피아니스트 임동창이 무대에 서보라고 권했고 1994년 11월 홍대 근처 100석 규모의 소극장에서 장사익 공연이 열렸습니다.

 

장사익 비로소 꿈을 이루다

 

장사익의 공연은 이틀동안 열렸고 이 기간동안 800명이 몰리고 매스컴에서도 소개가 되면서 화제성을 갖추게 됩니다.

 

대중가요 전성기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신승훈 같은 20년 후배들이 가요계 정상을 주름잡던 시기에 등장한 장사익은 트로트풍 대중가요, 판소리, 재즈 등이 혼합돼 있는 독특항 장사익 창법을 만들어 자신만의 음악을 시도합니다.

 

노래를 하면서도 태평소를 놓치 않더니 한대 태평소 연주자로 서태지와 아이들 <하여가>라이브 무대에서 태평소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카센터 일을 할 때 서태지 매니저가 차 고치러 왔다가 그의 태평소 실력에 공연에 올랐다고 합니다.

 

사실 소리꾼이라는 호칭은 국악 쪽에 남아있지만 사람들은 장사익에게 <소리꾼>이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1993년 전주대사습 공주농악, 금산농악에서 장원, 한국방송 국악대제전 뜬쇠사물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국악인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때는 태평소를 불었기에 그러했지만 어느덧 국악 공연 이후 뒷풀이를 하면서 반주삼아 신나게 소리판이 벌어지면 어느덧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고 합니다.

 

찔레꽃으로 국악 대상을 받으며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를 낸다고 평가받는 장사익은 어느덧 95년에 발매한 <하늘 가는 길> 이후 기침, 허허바다, 꿈꾸는세상, 사람이 그리워서, 꽃구경, 역, 꽃인듯 눈물인듯 등 2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타이틀을 바꿔 공연을 하는 위치에 오릅니다.

 

이미 단단한 마니아 층을 형성한 장사익은 한 때 가왕 조용필 부럽지 않다는 말을 할만큼 강력한 티켓파워를 갖고 있을만큼 단단한 입지를 굳혀나갔습니다.

 

장사익 성대 결절


장사익은 2015년 말부터 조금씩 성대에 무리가 생겨 2016년 초에 처음으로 성대결절이 생겼다고 합니다. 가수에게 목소리가 생명인데 겁부터 났다고 합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됐고 꾸준히 관리해 현재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장사익 가족 집안 자녀 직업

 

장사익 아버지는 돼지 장수 였습니다. 농가마다 키우는 돼지를 축산업자에게 대신 팔아주고 수수료를 받는 일을 했습니다. 어린 장사익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쓰레기를 얻어다 겨를 섞어 돼지 밥을 주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 모두 무학인데 아버지는 성냥개비로 즉석 주판을 만들어 셈을 할만큼 상술이 뛰어났고 어머니를 떠올리면 '먹으라'는 말만 생각난다고 합니다. 볼 때마다 밥 먹어라해서인데요.

 

장사익이 서울로 유학길을 떠나고 어느날 어머니가 편지를 써 보냈다고 합니다. 기억나는 대목은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한데 건강 조심허구 맛난 거 사먹어라'며 용돈을 함께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내는 장사익이 서울 소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방송 생준계 기획을 낸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장사익을 팬이 었고 그 공연이 인연이 되어 장사익을 매니저를 맡으며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자식을 아들이 둘 있는데 큰 아들과 작은 아들 모두 대금을 연주 합니다. 국립극장과 정동극장 단원으로 있으며 큰 며느리는 가야금을 연주하며 안산시립국악단에서 활동했습니다. 둘째 며느리 역시 한국무용 전공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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